달이 내 곁에 있기를 바랍니다
[알베아크]관계 본문
관계
Written by. 브루나
세상에는 어느 한 쪽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나는 너와 나의 관계가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죽은 너를 보기에는 내가 너무 아팠다.
* * *
의식이 새카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온 몸의 감각이 돌아오고, 얇은 눈꺼풀 너머로 들어오는 빛이 느껴졌다. 문득 살결을 감싸 안는 이불의 부드러움이 무언가 낯설어서 아크는 눈을 번쩍 떴다. 회청색과 금의 빛깔이 함께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의 몽롱함을 담은 그것은 낯선 천장을 훑었다.
“일어났어?”
그 목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킨 아크는 명확한 당혹감을 품고 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예전에 스쳐가듯 보았던 때는 몰랐었던 과거와의 차이점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지만 결국은 추억을 함께했던 알베르, 제 친우가 맞았다. 그의 얼굴은 흐릿한 웃음을 겉으로 내보였다.
과거에는 친우였으나 현재의 적이 된 그에게 머뭇거리면서도 적의를 표하자 흐렸던 웃음이 한 층 더 서글픔을 품고 짙어졌다. 낯설었다. 아크는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울음과도 같은 웃음을 바라보며 한 번 더 생각했다. 잠에 들기 전, 혹은 기절하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가. 푹신한 침대에 오른손을 짚고 아직까지 낯선 무기를 위협하듯 내민 채 곰곰이 생각하자 찌릿한 통증이 머리에서 느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머리의 후두부 쪽이 찢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통증을 시작으로 기절하기 전의 기억이 물감 번지듯 되살아났다. 잠시 방문했던 그란디스와, 결계의 영향으로 축 처지던 몸, 우연히 마주한 알베르… 아니, 과연 우연이었을까?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인지 아니면 지친 몸이 문제인지 덜컥 무너진 몸에 머리가 한 층 더 울렁였다.
“아크!”
이 울렁임의 이유에는 분명 네 행동도 포함되겠지. 무의식적으로 다가오는 알베르를 쳐내자 그 손과 얼굴에 날카로운 상처가 생겨났다. 아크는 눈에 들어온 붉은색에 되려 제가 더 놀라 통제하지 못하는 제 왼손을 훅 뒤로 빼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알베르는 통증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 없이 등을 돌려 휴지를 몇 장 뽑아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냈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핏자국이 새하얀 피부 위에 흔적을 남겼다.
알베르는 그의 존재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무의자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매끄러운 동작이다.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최선의 길만을 찾아가는 그를 닮아 있었다. 아크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부드러운 시트가 주름졌다. 얇지만 깊게 자리한 상처에서 피가 다시 한 번 고여 밑으로 흘러내렸다. 눈물짓는 상처를 잔인하게 휴지로 문댄 알베르가 아크와 눈을 맞췄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녹색 눈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아련함이 물들어있었다.
아크의 낯선 왼손이 어서 그를 공격하라고 아우성쳤다. 과거가 어떻게 되었던 그는 현재의 적이라며 강력하게 주장하고 자꾸만 무기를 더욱 날카롭게 세웠다. 아크는 머릿속에 울리는 그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넘기고 벽에 기댄 몸을 조금 움직였다. 딱딱한 벽에 닿은 후두부가 찌릿찌릿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한 알베르는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등을 보였다. 참 낯선 행동이다.
사관학교의 우등생 중에서도 똑똑함이 돋보였던 그가 짧은 시간 내에 피살 가능성이 있는 적을 두고 등을 보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작은 몸가짐 하나로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아크는 오른손으로 시트를 꾹 그러쥐었다. 알베르는 그런 아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랍에서 구급 키트를 가져오더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뒤 돌아봐.”
“…직접 할게.”
“머리 뒤는 어떻게 하려고? 뒤 돌아봐.”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투는 싸늘해도 목소리는 한껏 다정함을 품고 있었다. 이것 또한 아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정말로 무엇을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서로 다른 색의 동공이 흔들리자 고심하는 듯 눈을 잠시 내리깔았던 알베르는 제 왼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해두면 안심이 될까?”
조금 멀리 있던 아크의 왼팔을 잡아 제 손목을 잡게 한 알베르가 여상스럽게 물어왔다. 혼란스러움이 또 늘어났다. 머릿속에 들어오는 낯선 정보가 너무 많아 이제 슬슬 기절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 대답에 서늘히 식어있던 얼굴에 미소 한 자락이 피어났다. 뒤 돌아봐. 세 번째로 나온 말에 결국 아크는 알베르의 손목을 엉거주춤 쥔 채로 등을 돌렸다. 그제야 보이는 벽과 시트의 상태는 제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처참한 살인 현장이라도 보는 듯 했다.
“조금 따가울 거야.”
다정한 목소리가 살갗에 닿는다. 그것을 느끼고 놀랄 새 없이 상처 부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살을 찡그리며 옅은 신음을 흘리자 큰 손이 아이 달래듯 등을 어루만졌다. 손길은 등을 어루만지다 날개뼈 부근에서 떨어져 나갔다. 괜스런 열기만 남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대신 머리 뒤쪽에 느껴졌던 고통은 나아진 것 같아 좋은 것이라며 자위했다. 분명 한 손으로 하기에 힘든 것임이 분명했지만 알베르는 익숙하게 거즈를 대고 그 위에 밴드를 붙여 고정시켰다.
이제는 등을 돌려도 될까 싶어 돌리려던 아크는 어깨를 붙잡아 고정시키는 행동에 바짝 몸을 굳혔다. 왼손에도 약하게 힘이 들어가 살갗을 가르는 느낌이 그대로 들었다.
“공격하지 않으니까 걱정 마. 등에도 상처가 있으니까… 옷은 벗는 편이 좋겠네. 벗을 수 있어?”
상처가 새겨진 제 왼 손목은 시야에도 넣지 않고 아크의 허리 부근을 두드린 알베르가 물었다. 아크는 어색하게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벗어보라는 말이 또한 여상하게 튀어나왔다. 망설임이 겉으로 드러난다. 알베르는 구태여 재촉하지 않았다. 결국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아크가 먼저 옷을 벗을 때까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천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흉터가 잘근잘근 채워져 있는 몸뚱아리를 바라보던 알베르가 손가락을 움직여 폭 패여있는 척추께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쓸어내렸다. 아크의 몸이 퍼뜩 떨렸다.
“무, 무슨…”
“미안. 푹 들어가 있는 게 신기해서.”
건조한 목소리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까는 그렇게도 풍부한 감정을 나타내더니 지금은 또 이렇게 꽁꽁 숨겨놓는다. 아크가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등과 허리를 잇는 그 어드메의 상처 위로 따끔한 감각이 뒤덮였다. 머리에 한 것처럼 테이핑을 꼼꼼히 마친 알베르는 팔에 있는 상처에도 동일하게 치료를 마치더니 구급 키트를 닫았다. 왼쪽 손목은 새로 생긴 상처를 품고 그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아크가 그에게 그 상처들은 치료하지 않느냐 묻기도 전, 한 개의 셔츠가 눈앞에 놓여졌다.
“이걸로 갈아입어. 이건 버리도록 할 테니까. 또… 이 방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 할 테니 알아두고.”
알베르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뒷모습은 하얀색 방문 틈으로 사라졌다. 탁, 하고 닫힌 문 사이로 모든 흔적이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아크는 멍하니 문을 바라보다 느릿하게 셔츠를 꿰어 입었다. 커다란 왼팔을 집어삼키려다 실패한 천 쪼가리는 장렬히 찢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 * *
오늘도 하루의 시작은 강렬한 시선과 함께했다. 아크는 아무런 요구 없이 와닿는 시선을 느끼며 몸을 뒤척였다. 알베르가 제한한 행동반경 내에서 할 것이라고는 그저 잠을 자거나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것뿐이었으므로, 아크는 그동안 풀지 못했던 피로를 전부 풀어 내리겠다는 양 시도 때도 없이 잠에 들곤 했다. 가끔씩 낯선 친우가 들고 오는 음식만 받아먹으며 그는 그저 제 몸의 회복에 힘썼다.
몸이 전부 회복된다면? 글쎄. 아크는 스스로도 자신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제 안에 있는 ‘그’에게 부탁해서라도 억지로 뚫고 나갈 수 있겠지. 그 생각에 안에 있던 스펙터는 반갑다는 양 동의했다. 물론 아크는 그것을 무시한 채 오늘도 생각을 한 번 더 곱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녹색에 금빛이 물들어있는 한 쌍의 눈동자가 아크를 마주했다.
“…언제 일어났어?”
“두 시간 정도 전에.”
“계속 보고 있던 거야?”
알베르는 의문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웃으며 글쎄, 하고 말을 끝냈다. 제가 일어난 것을 보았으니 식사 준비를 하러가는 모양이었다. 찝찝함을 부러 떨쳐낸 채 다시 몸을 뉘였다. 이미 충분한 수면을 취한 몸은 말똥한 정신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잠으로 시간을 때우는 것도 못하려나. 그렇게 멍하니 천장의 무늬를 세고 있자 문이 열렸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말없이 침대 위에 탁자를 펴고 음식들을 올린 알베르는 아크에게 스푼과 포크까지 쥐여준 후 제 자리에 앉았다. 시선은 여전히 아크를 향했다. 이 부담스러운 식사는 이곳에 감금된 이후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조금은 익숙해진 아크가 고소한 향을 내뿜는 비프 스튜를 한 입 떴다. 아직 뜨거운 그것이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었다.
아크는 맛있는 냄새에 흐리게 허기가 지는 것을 느끼고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후후 부는 흐름을 따라 하얗게 올라오는 김이 그 모양을 바꿨다. 여전히 알베르의 시선은 따끔했다. 그래서 부러 먹는 것을 빠르게 했다. 뜨거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입에 넣었다가 입천장을 덴 것 같지만, 생활에 있어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을 그저 바라만 보던 알베르는 아크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상을 정리했다. 식기를 치우고, 테이블을 접는 행동은 무슨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 마냥 딱딱 맞아 떨어졌다. 이번에는 알베르에게 아크의 시선이 던져졌다. 매사에 반응했던 저와 다르게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조금 실망하려던 것도 찰나, 그가 구급 키트를 가져오자 얌전히 윗옷을 벗었다.
아침과 저녁을 먹고 필수로 이어져온 치료는 아크의 상처를 대부분 낫게 만들었다. 이제는 머리를 벽에 대도 아프지 않았고, 피가 배어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소독하는 알베르의 행동은 여전히 성실했다.
오늘도 똑같으리라 생각한 아크는 왼손을 살짝 들었다. 그 성실함은 스스로의 한 손을 저에게 맡기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혼자 속으로는 이제 그만해도 괜찮지 않을까 했지만, 저보다 오히려 알베르가 더 안심해 하는 모습에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검붉은 색의 흉기가 손목을 감싸자 오른 손이 다가와서 머리 뒤에 붙은 거즈를 떼어냈다.
대부분 아물었다고 해도 아직은 따끔한 기운이 남아있어서 아크가 작게 신음했다. 그 위에 소독약을 부으니 기분 나쁜 따끔함이 계속되었다. 알베르는 그것을 직접 보지 않았지만 알 것 같은 느낌에 아크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오히려 그 손길이 더 진정하지 못하게 한다고 알고 있을까. 만약 그것을 안다면 정말 나쁜 것이 틀림없었다. 아크는 속으로 말을 삼키고 새로운 거즈가 닿자 한숨을 폭 쉬었다. 이게 무어라고 벌써 지친다. 알베르는 작은 한숨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해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아크는 눈을 감고 숨을 느리게 쉬었다. 그러다가 평소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에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알베르에게도 보였을 행동이지만 그는 무시했다. 일부러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 무언가는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부분이라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등을 어루만지던 손은 첫날과 동일하게 날개뼈를 약하게 터치한 후 떨어져 나갔다. 그 바로 밑이 현재 치료 중인 상처였다. 이번에도 머리 쪽 상처를 만질 때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팔에 있는 상처는 소독을 금방 끝마쳤다. 거즈를 떼고, 소독을 하고, 다시 새로운 거즈를 붙인다. 이제 옷을 입어도 되는 걸까. 다시 등으로 돌아온 손바닥을 느끼며 아크는 살그머니 알베르의 기색을 살폈다. 그저 손바닥을 아크의 등에 댄 채 가만히 있는 것이 다인 듯 했다.
잠시 눈치를 보던 아크는 입을 열려다 어깨에 온기가 닿아오자 파득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검은색 머리칼에 알베르가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며 알 수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은 오른쪽 볼을 간지럽혔다. 여전히 제 커다란 왼 손 안에 들어와 있는 손목이 신경 쓰였다. 알베르는 다시 한 번 움직여 이번에는 아크의 어깨에 입술을 문댔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선연하게 귀를 뚫고 지나가자 아크가 눈을 꾹 감았다. 기다란 귀 끝에도 살랑이는 머리칼이 닿아왔다.
“언젠가는 내가 죽기 전 네가 먼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어.”
어깨에 머무르던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네가 죽을 수도 있던 그 날을 지나고 알아차렸지.”
입술은 귓가에 머물렀다. 오른팔을 잡고 있던 손이 흉터로 차있는 아랫배를 더듬었다.
“난 네가 죽으면 살 수 없어, 아크. 관계의 종지부는 내 죽음으로 끝나야 하고, 또한 그 옆에 너의 죽음이 없으면 안 돼.”
단호하게 단정 짓는 목소리가 곧장 귀로 들어왔다. 배를 훑던 손이 이제는 그 허리를 전부 안고 꽉 끌어당긴 채 품에서 내보내지 않았다. 아크는 머릿속을 채우는 단어들의 나열에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 말을 곱씹었다. 예상치 못했던 말들이었다. 그저 친우로 생각했던 저와는 다르게 알베르의 안에서 저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 생각과 동시에 귀 위로 내려앉는 입술을 느끼고 아크는 왼 손을 알베르의 손목에서 떼어냈다. 고개를 움츠린 것도 함께 튀어나온 반응 중 하나였다. 입술 대신 콧바람이 여리게 귀를 두드리며 사라졌다. 상심의 뜻이 섞여있는 바람이었다. 아크는 허리에 둘러진 단단한 팔을 풀기 위해 애썼다.
물론, 어린 아이처럼 꽉 안고 놓아주지 않는 알베르에게서 벗어나기란 힘들었지만 결론적으로 어떻게든 품을 빠져나오자 불퉁한 표정이 그대로 보였다. 아까 생각했듯 어린 아이를 닮은 얼굴이었다. 아크는 찬찬히 생각한 말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너의 곁에 계속 있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것보단, 네가 필수적이라는 것에 가까웠지.”
“어째서?”
“글쎄.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것들은 독점욕이나 연애감정 아닐까.”
턱 막힌 말에 아크는 입을 다물었다. 독점욕과 연애감정. 참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 반응에 알베르가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아크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먹이를 사냥하는 맹수 같은 얼굴이었다. 떠오른 것과 동시에 손이 뻗어져와 목을 낚아챘다. 맹수는 한 번 정한 먹이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언젠가 들었던 문장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강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목을 감싼 손이 아크를 앞으로 끌고 나왔다. 눈앞에는 자연스레 감겨있는 알베르의 눈이 보였다. 입술이 맞닿고서 느낀 것은, 참 부드럽다 하는 것이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군인의 직함을 달고 있었을 텐데 말캉하니 닿은 입술은 참 부드러웠다. 아크는 잠시간 눈을 깜빡였다. 이대로 내가 받아들이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적? 아군? 그것도 아니라면 네가 말한 듯 연애감정을 받아들이고 연인이라는 관계로 변해버릴까?
문득 두려움이 마음에 싹텄다. 더 이상의 변화는 겪고 싶지 않았다. 크나큰 격변을 겪은 이로서, 모든 것에 대해 변화라는 것을 겪은 이로서, 더 이상은…….
알베르의 눈이 뜨였다. 녹색 눈이 무엇 하냐는 양 오묘한 빛의 오드아이를 바라봤다. 그에 홀린 듯 두 가지의 색채를 얇은 살밑으로 숨겨버렸다. 녹림의 색은 만족감을 잔뜩 품고 다시 사라졌다.
두 사람의 키스는 그저 순수한 입맞춤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짧은 입맞춤에도 아크가 느낀 분위기는 분명 농밀하고 매혹적인 키스의 한 부분이었다. 알베르는 금세 입술을 떼어냈다. 번뜩 뜨인 눈은 서서히 관계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이의 속눈썹을 진득하게 쳐다봤다. 파르르, 긴장으로 떨리는 그것은 다시 한 번 두 가지 색채의 눈동자를 한 번에 내보였다.
“어차피 너를 구한 것으로 내 지위는 바닥으로 떨어졌어. 지금 이곳에만 있는 것도 결국 군대에는 배신이라 새겨지겠지…. 너를 떠날 수 없는 날 네 곁에서 죽게 해줘, 아크.”
알베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속삭였다. 귀를 자세히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너에게만 들려주겠다는 듯 작게 읊조렸다. 어찌 보면 혼잣말 같기도 한 그것을 아크는 똑똑히 들었다. 예민한 하이레프의 귀는 움찔거리며 그 문장에 대해 대답하고 있었다.
녹음은 불과 얼음을 함께 마주했다. 결국 서로에게 사로잡힌 것은 두 사람이었으며, 누가 먼저다 할 것 없이 다시 입술을 겹쳤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분명 키스대신 죽음을 나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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