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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버번]Gray 본문

AKAM/단편

[라이버번]Gray

브루나 2017. 4. 14. 21:31

 희여멀건한 담배연기가 공중으로 퍼진다. 겉으로는 꾸역꾸역 멀쩡한 척 하고 있지만 속은 뇌를 꼬아놓은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그것을 드러낼 수 없기에 라이는 오늘도 담배를 손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그렇게도 기피하며 거리를 둬왔던 마약성 진통제의 일종이었다. 조직에서 유통하는 부류 중 하나인지라 손에 넣는 것은 쉬웠다. 코드네임까지 얻은 그는 말단들이 움직이는 상황에서 돈만 제대로 쥐여 준다면 온갖 것들을 가질 수 있었다.

 본래 그의 직업상 조직의 것에는 손을 대지 않았었지만 인간이기에, 센티넬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이 고통은 도저히 평범한 진통제로는 넘어갈 수가 없었다. 유럽 어드메의 나라에서 새로 개발되었다는 이 진통제는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 임무가 있는 날에는 통상으로 유통되는 진통제 한 알로 버텼다.

 그리고 오늘은, 임무가 없는 날이었다.

 세이프 하우스 안을 가득 채우는 담배 연기는 어떻게 보면 불이 난 것처럼 보이게도 만들었다. 밖에서 이것을 본다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그는 뻐끔 입을 벌려 담배연기를 토해냈다. 제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뱉어내겠다는 듯 입 밖으로 연기를 뿜어냈다.

 언제나 여유롭고 이성적이던 그가 현재의 상태로 전락한 것은 웃기게도 자신을 든든하게 받쳐주던 능력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믿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능력은 제 의견도 물어보지 않은 채 저를 떠나 통제권을 다른 이에게 넘겼다. 아마색 살이 보드라운 사람이었다. 강박적일 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했고, 자존심이 강해 가이딩을 할 때마저도 저에게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밀빛 머리는 양 귀 쪽이 귀엽게 삐쳐나와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저를 볼 때면 빈정거리는 빛을 띠었지만 아름답게 반짝일 줄 알았고, 몸 선이 예뻐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고,

 짙은 마약성에 정신이 흐려진다. 신기루마냥 사라진 네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 비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슬슬 폭주가 가까워진 것이다. 일반인보다 배로 좋았던 시력은 이제 흐릿하고 마구잡이로 눈앞을 맑게 했다 흐리게 했다 성을 부렸다. 청각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생활을 할 때에는 적당히 닫아두었던 인식의 문을 제멋대로 열어 5층에 존재하는 그에게 지하 1층의 구타소리마저 들리게 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이가 울었다. 그 소리를 듣다보니 자신도 울고 싶어졌다.

 그를 찾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조직의 임무를 받아 이 나라에서마저 나간 것이었고, 그와의 연관성은 단순하게 행동을 함께 한 것뿐인 자신이 그의 행방을 묻는다면 단연컨대 의심받을 것이다. 변명이다. 지긋지긋한 변명이었다. 그저 나약한 자신은 저를 증오하는 그의 눈을 보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스카치!’

 

 총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간 남자의 이름을 놓지 못한 채 저를 표독스럽게도 노려보던 그 눈동자가 제 안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잔재라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다. 슬픔과 고독과 증오가 한데 모여 만들어낸 그 짙푸른 눈동자는 그때마저 아름다웠다. 넓지 않은 일본의 하늘을 바라보며 느끼는 가슴의 답답함을 닮아있었다.

 신이라는 것은 참으로 잔인해서 때마침 저는 그에게 각인했다. 그는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더라면 책임감으로나마 제 곁에 남아있었겠지. 며칠 동안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몇 주를 비우지는 않았을 터였다. 라이는 흐릿하게 머리를 쑤시는 둔통을 잠재우려 담배를 다시 한 번 입에 물었다. 숨을 들이마심과 동시에 지독한 연기가 폐 안쪽 깊은 곳까지 집어삼킨다. 그대로 입을 떼지 않은 채 공기를 밖으로 밀어내자 코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코의 점막으로까지 흡수된 성분은 머리를 탁하게 만들었다. 센티넬의 본능 대신 자신이 자리를 차지해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아파요, 아파요. 하지 마세요. 제 통증은 탁해졌지만 아이는 더 크게 울었다. 누군가 들어달라는 것 마냥.

 라이는 이제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고통은 없어도 머릿속에서 날뛰는 능력은 착실하게 그를 갉아먹었고, 이제 정신은 아주 얇은 선 위에서 널을 뛰었다. 하얗게 반짝이며 아주 작은 건드림에도 끊어져버릴 은실 위에서. 라이는 담담히 제 정신이 폭주하기를 기다렸다.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그래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자신이 죽은 이유가 그에게 닿는다면 그가 가지게 될 자그마한 죄책감이 저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비열했다. FBI라는 직업은 어떻게 따낸 것인지 이제는 저도 이해되지 않았다.

 라이는 끝의 마지막 벼랑까지 몰리면서도 그저 침착함을 유지했다. 마지막 자비라는 것처럼 그의 능력은 제 할일을 다했다. 언제까지나 이성을 지키며, 조용하고 차분하게 정신을 유지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마구잡이로 조정되는 시야가 어지러웠다. 귓가에 울리는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도 이제는 지겨웠다.

 

 그때였다.

 

 달칵, 하고 절대로 들릴 리 없는 소리가 귓가에 거슬렸다. 콜록거리는 기침소리도 들려올 일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폭주하고 사망한 뒤에 이곳에 가장 처음 들어오는 사람은 연락이 닿지 않아 세이프 하우스를 찾아낸 누군가여야 할 터였다. 놀란 마음에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 속에는 노란 밀색이 보였다. 밀빛의, 아마색의, 푸른빛의

 네가 보였다. 돌아올 일 없는 네가.

 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우당탕 넘어지는 그를 보며 버번은 적잖게 당황한 듯 했다.

스카치가 사망한 이후 약간의 불면증과 동시에 라이에 대한 증오심으로 공안에 보고를 마친 후 그는 삼 주 동안 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맡았었다. 조직은 일본 내에서만 움직이지 않았고, 미국과 아프리카, 유럽 등에도 손을 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럽에서 일어난 총기밀매를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돌아오자 생각나는 것은 라이였다. 제 동료를 자살로 몰고 간 남자. 증오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왜인지 그의 마지막 눈빛만은 제 안에 남아있어서 꼭 어딘가가 불편했다.

 아무것도 남겨놓은 것은 없었지만 그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그치며 그와 스카치, 라이가 함께 사용했던 세이프 하우스로 발을 놀렸다. 라이는 이미 사라지고 난 다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그렇다면 자신에게 좋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깔끔하게 털어버리고, 다시는 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 찾아가게 된 세이프 하우스의 문을 열었더니 그곳에는 불이 난 것 마냥 자욱한 연기가 그득 차있었다. 화들짝 놀라 안쪽으로 발을 옮기자 그제야 냄새의 정체를 알았다. 유럽부근에서 지겹도록 맡던 마약성 진통제의 향이었다. 마약을 직접 폐로 들이마시기 때문에 효과는 발군이라고 아부하던 마약상이 기름진 얼굴로 말했었다. 버번은 소매로 입과 코를 막았다. 누군가 발견할까 문을 단단히 닫은 후 안쪽으로 들어가자 제 영혼의 반쪽인 것 마냥 쓰고 다니던 비니도 던져놓은 채 눈을 흐릿하니 뜬 라이가 있었다.

 흐린 녹색 눈이 자신을 향하고, 눈이 동그래지더니, 일어나려다 넘어진다. 이렇게까지 무방비한 모습은 처음 봤다. 그는 언제나 완벽함만을 추구해서 자신마저 혀를 내두를 때도 있었다. 가이드라는 것은 둘째 치고 사람을 많이 만나야 했던 자신이기에 스스로도 저에게 엄격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과도할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그 어떤 때나. 그러면서도 분위기는 여유로워서 가이딩 때만은 얼굴을 무너트리려고 아등바등 노력했던 과거의 자신이 있었기에 조금 부끄러웠던 때라고는 생각한다.

 그랬던 라이가 이렇게도 무방비하다. 일어나려고 의자를 짚었고, 자신에게 비척거리며 걸어오려다 또 넘어질 뻔 했다. 버번은 혼란스러웠다. 과연 이 사람이 진정으로 라이가 맞나 싶기도 했다. 흐릿한 눈도 그렇고, 흐느적거리는 행동거지도 전부 다 라이와는 정반대라고 외쳐댔다. 그러면서도 눈빛이 마지막 그 순간에 보았던 눈을 꼭 닮아 있어서 버번은 자신을 끌어안는 라이의 팔을 느낄 때까지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 잠깐. .”

 

 버번은 자신에게 쓰러지듯 접촉하는 라이를 보며 입가에 가져다 대었던 손을 떼어냈다. 직격으로 들이마신 담배연기에 콜록이며 몸뚱아리를 침대에 던지듯 눕히고 창문을 열자 자욱했던 연기들은 고맙다는 것처럼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조금 더 먼 쪽에 있는 창문도 마저 열기 위해 다가가자 어느새 다가온 라이가 제 몸을 포박하듯 끌어안았다.

 

 “아 진짜

 

 화를 내려던 버번은 잔잔하게 떨림이 남은 라이의 신체를 알아차리고 입을 우물거리며 닫았다. 이제 보니 그는 자신의 목 부근에 얼굴을 묻고, 손목을 꼭 잡아 자신과 닿는 면적을 최대한 넓히고 있었다. 설마 제가 없을 동안 가이딩을 안 받은 건가? 그것이 진실이라면 이 사람은 센티넬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센티넬은 일 주 이상 가이딩을 받지 못하면 불안상태에 들어서고, 보름이 지나면 폭주하기 마련이었다.

 자신이 이 남자와 만나지 않은 것은 벌써 삼 주나 되었다. 평범한 센티넬이라면 이미 폭주해 사망한 후 장례를 다 치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라이는 버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가뭄의 단비처럼 제 정신상태를 안정시켜주는 접촉에 잔뜩 취해서 슬그머니 옷 속으로까지 침투했다. 꾸물거리며 들어오는 손에도 버번이 반항하지 않자 그는 게걸스럽게 접촉을 갈구했다. 아예 마시지 않았던 때라면 모를까, 한 모금의 단비가 목을 적시자마자 갈증은 뜨겁게 그를 달궈놓았다.

 

 아이는 이제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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