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내 곁에 있기를 바랍니다
Smilax sieboldii(to.라빈님) 본문
Smilax sieboldii:청가시덩굴의 학명
당신이 만드는 그 가시덩굴에 나는 스스로 들어갔다.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Written by. 브루나
오늘이 당신을 만나는 날이기에 언제보다도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신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눈길을 보내줬으면 해서 그렇기도 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았으면 해서 그렇기도 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는 현재 나의 연인이다. 그가 나의 앞에 나타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로, 엘레나 박사님의 딸이 중학생이 되어 내가 적당히 그 집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는 내가 혼자 살게 된 옆집에 살고 있었다. 박사님이 어떻게 연락을 하신 것인지 그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고, 나를 챙겨주려고 했지만 어느새 포지션이 바뀌어서 내가 그를 챙기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을 오랫동안 잡아놓고 일의 시간대가 휙휙 바뀐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뭐, 그 덕분에 요리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긴 했지만 옆에서 보는 입장으로는 좋지 않아 보이긴 했다.
내가 그의 곁에 있으면서 늘어가는 것은 잔소리와 요리실력 뿐만이 아니라 조그맣게 움튼 마음의 씨앗도 함께였다. 그가 옆에 있는 시간동안 물과 양분은 충분히 주어졌고, 그것에 반응해 그 싹은 조금씩이지만 꿈틀거리며 성장해 나갔다. 마음이라는 화분에 뿌리내린 사랑은 차근차근 줄기를 뻗어나가 그 끝에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때 나는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린마음에 뭣도 모르고 고백했다. 전혀 로맨틱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저 스치듯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고백의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 약간은 사고와 같은 상황이었다. 나도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당황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패닉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그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내 고백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사랑하는 상대에게서 나온 수락의 말에 활짝 웃었던 것 같다. 기억은 역시나 잘 나지 않는다. 그저 그때 그가 지었던 다정한 웃음만이 뇌리에 박혀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나에게 조금 더 다정해졌다. 나도 그의 곁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집은 존재했지만 학교가 끝나고 나서 향하는 곳은 그의 집이었다. 어차피 바로 옆집이었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었다. 그저 마음속이 꽉 채워진 기분이 들었고, 뭘 하던 행복할 뿐이었다. 그 덕분인지 친구들이 성격 좋아졌다며 말하고는 했다.
그 행복함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언젠가의 금요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던 도중 길 건너에서 그를 발견해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려던 참이었다. 그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갔다. 나보다 조금 더 짙은 금발에 청안을 가진 예쁜 여자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다가 그녀가 옆으로 다가가자 그녀의 허리를 잡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분명한 것은 그 쪽은 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바람, 이라는 두 글자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의 성격을 생각해내 그저 회사의 동료일 것이라고 나를 타일렀다. 그가 일에 관련된 전화를 할 때 영어로 많이 했었으니 서양인 한 명 쯤 있을 수 있었다. 응, 괜찮을 거야.
나는 그저 스스로를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
* * * * *
그 이후로 그는 나에게 다양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의 옆에는 다양한 여자들이 있었고, 그는 그 여자들과 너무나도 달콤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었다. 매번 바뀌는 여자들은 모두 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점점 더 그의 곁에 있는 것에 대해 자신감이 떨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내가 눈에 들어오는 걸까. 어째서 그런 사람들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해주는 걸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나의 곁에 있어주어야 하는 이유를.
내가 좋은 것일까? 그래. 그러나 연인사이가 아닌 친한 형과 동생으로의 사이에 가까웠다. 내가 식사를 챙기니까? 아니. 그라면 죽기 직전이 되었을 때 그제야 밥을 챙겨 먹어도 아무 불만이 없을 사람이었다. …아. 머릿속에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나는 그 가정을 최대한 멀리하려고 머리를 털었지만 그 가정은 진득하게 내 뇌에 달라붙어 섬찟한 소름을 자아냈다.
박사님께 부탁받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라, 면?
어린아이의 치기로 한 번쯤 탈선할 수 있는 것이리라 생각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나의 마음이 고작 호기심으로 치부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마음이 나를 삼켜버릴 정도로 커다랗게 자라났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 물음을 스스로에게 물으며 시간을 그저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현관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리자 그는 이미 나의 앞에 와서 서있었다. 등 뒤에 맨 기타가방이 무겁게 그의 어깨를 누르는 것만이 보여 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짐을 받아들려다가 그가 먼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오자 조용히 손을 내렸다. 아카이,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닌 거죠? 아카이도 나를… 사랑하는, 거죠? 나는 내 생각이 틀리기를 바랬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어버렸다.
“아카이는 정말 상냥하네요. 내가 이렇게 갑자기 들어와 있는데도 지겹지 않아요?”
이 말에서 당신은 내 말의 진의를 찾을 것이다. 내가 무서워서 겉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당신은 잘 파헤쳐서 나의 진심을 알아낼 것이다. 나는 힐끗 아카이를 올려다보았다. 녹색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이 내 뇌를 꿰뚫어보는 듯 한 기분이 들어 약간 섬뜩했다. 나는 성급하게 눈을 피했다.
“…너는 그저 어릴 뿐이니까.”
그 말이 나의 말처럼 이중적 의미를 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또 바보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간다. 마음이 욱씬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의 말은 가시덩굴처럼 내 마음을 감싸고 들어와 꽉 조여 상처를 내고 더 파고든다. 나의 마음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남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무거운 마음을 알았다가 그가 떠나 갈까봐 하는 무서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부모의 얼굴과 이름도 모른 채 엘레나 박사님의 손에서 자랐다가 그에게 구원받는 나는 그를 거역할 수도 없었고, 하물며 그가 떠나간다면 나는 분명히 무너질 것이다.
나는 그저 웃었다. 그에게 순응했다. 그가 나의 곁에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지라고.
'AKAM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슈레이]Stay with me (0) | 2016.11.26 |
---|---|
[오키아무/슈레이]반짝반짝 (0) | 2016.11.17 |
[슈레이]My lovely vampire (0) | 2016.11.09 |
[오키아무]Merry merry Halloween (0) | 2016.11.09 |
[슈레이]불면증 (0) | 2016.11.09 |